도둑놈과 여행

나의 꿈은 세계 일주

중학생 시절 나의 연습장을 들여다보면 드넓은 마당을 가지고 있는 대 호화 2층 저택이 그려져 있다. 지하에는 노래방이, 1층에는 주거 공간이, 2층에는 함께 사는 동물들을 위한 방들이 칸칸이 그려져 있다. 그간 키우고 싶었던 호랑이나 사자와 같은 맹수나 원숭이, 새, 개가 주로 그려졌다. 집의 주인인 나의 나이는 서른 살. 20대에 세계 일주하고 와서 서른 살에는 어느 북적한 도시 한 가운데 나만의 집을 짓고 살고 있다.

고등학생이 되니 한참 나중의 일 일 것만 같은 집에 대한 욕심보다 지금 당장 여행을 가고 싶은 욕망이 컸다. 태국이 배낭여행의 성지라고 하더라. 태국 여행자들이 모이는 사이트에 매일 출석 도장을 찍으며 ‘고등학생 여행’, ‘고등학생 혼자 여행’, ‘미성년자 혼자 출국’ 따위를 검색했다. 태국 방콕 시내의 지도를 출력해서 어디를 갈지 살피기도 하고, 현지 사기꾼의 사진이 올라오면 유심히 보며 기억하려 했다. 새로 올라온 글을 다 읽으면 주변 국가에 대한 글도 다 읽었다.

 

사라진 꿈

막상 혼자서 여행을 갈 수 있는 성인이 되니 구체적으로 여행 계획을 세우거나 실행에 옮길 생각을 하진 않았다. 학기 중에는 물론이고 방학 때도 학교에 머물렀다. 3학년이 되니 친구가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했다. 여행 자금을 모으기 위해 나도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했다. 나조차도 속이는 마음속 목적은 여행이 맞았지만 사실 그냥 돈이 있으면 좋고, 대학 때 아르바이트나 한 번 해볼까 하는 게 컸다. 깊은 마음은 내가 그 돈을 들여 여행을 가지 못할 사람인 걸 알고 있었다. 꿈이 뭐냐고 물으면 항상 배낭여행 혹은 세계 일주라고 답했지만, 추상적이었고, 100년 후의 미래 같이 멀게만 느껴졌다. 시간은 영원할 것 같고, 돈은 10원짜리 하나도 아깝던 시절이었으니까.

집에서 생활비도 받고, 아르바이트도 하지만 돈 쓰는 법은 모르니 돈이 쌓였다. 100만 원 정도 생겼을 때의 기분은 참 묘했다. 이렇게 큰돈을 만져보다니, 세상 부자가 된 나는 이 돈이 여행으로 없애버리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수 없었다. 100만 원은 큰돈이고, 여행은 짧다. 그때 ‘나중에 나이가 들어도 난 여행을 가지 않겠구나’하는 확신이 생겼다. 현실에 수용당하는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꿈틀거렸다. 슬펐다고 말하면 슬펐던 거 같기도 하지만 크게 아쉽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라진 돈

깜깜한 새벽, 4시가 넘어 집에 들어가 잠이 들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기 위해 오전 9시쯤 눈을 뜨니 누가 부스럭거리며 잠긴 현관문을 열쇠로 여는 소리가 났다. 현관문을 바라보니 반쯤 열려있었다. 난 혼자 자취하고 있는데. 아르바이트에 못 간다고 전화를 하고, 경찰을 불렀다. 돈이 벌리는 건 좋았지만 쓸 곳도 없고 관리할 필요도 못 느끼고 그저 집에 쌓아 놨었는데, 그 돈이 다 없어졌다.

참 웃긴다. 돈이 사라지니 여행을 가지 않았던 게 후회가 되었다. 어차피 사라질 거 여행 때문에 사라지게 할걸 하는 후회. 마음속으로 누군가에게 돈을 되찾으면 여행을 갈 테니 다시 돌려달라고 말했다. 누군가가 내 말을 들어준 걸까? 몇 달이 지나고 범인이 잡혔다. 합의금도 받았다. 사람은 간사하고, 쉽게 변하지 않는다. 다시 돈이 생기니 여행 가는 데 쓰기 아까웠다. 합의금을 받지 않았다면 나는 여행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난 그 도둑놈에게 항상 감사하다. 내 인생을 바꾸었다.

 

사라진 핸드폰

첫 배낭 여행지는 태국이 될 거라 확신해왔었는데, 그동안 너무 많이 찾아봐서 이미 여행 다녀온 것 같기도 하고, 말레이시아로 가는 항공권이 제일 저렴하더라. 그래서 말레이시아에 가기로 했다. 좁은 비행기에 갇혀있으니 두통이 심하게 왔고,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하니 저녁이어서 그날은 그냥 잤다. 다음날 본격적인 여행을 하기 위해 시내로 나섰다. 나온 지 한 시간은 지났을까? 핸드폰을 도둑맞았다. 출시된 지 몇 개월 안 된 최신형 아이폰이었다. 신발 가게 안에서 도둑을 맞았으니 가게 직원에게 CCTV를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경찰서에서 허가서를 뽑아와야 보여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경찰서로 갔다.

경찰서에서 신고하고 CCTV 확인서를 끊어서 가게로 돌아가니 CCTV를 안 켜놓았다고 한다. 그렇게 핸드폰을 잃고 여행을 다녔다. 고가의 핸드폰 가격도 계속 머릿속에 맴돌고, 사람들과 말도 안 통하기도 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핸드폰에서 하던 오프라인 게임 레벨까지도 아쉬워하며 얼른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났다. 그러다가도 여행은 해야 했기에 종이 지도를 들고 현지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가며 다니며 내 여행 스타일을 만들어 갔다. 길 가던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달라며 부탁을 하기도 하고, 친구를 사귀어가며 여행의 참 재미를 알아갔다. 점점 핸드폰에 대한 생각은 잊혀졌다.

 

도둑놈 도둑님

그 영향으로 여행을 가서 핸드폰을 거의 보지 않는다. 숙소에 두고 다니거나 가방 속에서 꺼내는 일이 없다. 이는 도난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행동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여행을 즐기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길을 모르고, 시간을 모르면 물어본다. 그래서 난 항상 현지 친구를 사귀고 이야기를 공유하고 함께 할 수 있었다. 전생에 도둑놈들과 뭔가 있나 보다. 확신하건대 핸드폰을 도둑맞지 않았더라면 여행의 재미를 못 느꼈을 거다. 아이러니하다. 앞선 도둑놈과 더불어 이 도둑놈에게도 감사하다.

도둑’놈’들이 도둑’님’들이 될 수는 없지만,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었음은 확실하다. 꿈을 좇고 있고, 행복한 나. 당시에는 고난이라고 부르던 과정이 지나니 나를 갈고 닦아 다이아몬드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앞으로도 살아있는 날이 남은 만큼 어떤 형태로의 도둑놈들을 만날 거고, 몇 번이든 만날 거다. 갈리고 닦이는 과정은 버겁기도, 힘들기도 할 거란 것도 안다. 그러나 갈리는 나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갈리고 갈려 더욱 반짝거릴 나를 바라볼 것이다. 다이아몬드가 되는 과정임을 알기에 난 즐길 준비가 되어있다.

Related Post

Leave a Comment

Start typing and press Enter to sea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