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 D-13] 주변 정리 중. 실감 나지 않음

여행을 위한 준비는 사실 할 것이 많지 않다. 현재를 정리하는 과정이 골치다.

8월 말, 한 달간 나의 집에 머물렀던 에이미와 이본이 떠날 때, 이상하게 이 여행을 위해 주변을 정리하는 느낌이 들었다. 한 달이 지나 회사를 퇴사할 때 다시 한번 크게 주변을 정리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지금으로부터는 13일 후는 모든 주변의 정리가 끝나고 새로운 시작의 문턱에 있을 것이다.

 

집을 빼야 해서 짐을 정리해서 할머니네로 다 보내야 한다. 짐을 나름 싼다고 며칠을 고생했지만 끝나지 않았다. 짐을 쌀 때는 이사가 한참 뒤의 일 같다가도 침대 위에서 빈둥거리고 놀 때면 시간이 정말 없는 것 같이 느껴진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깊다. 처음으로 서울에 살아봤다. 처음으로 나 혼자 원룸이 아닌 가정집에 가까운 형태의 집에 살아봤다. 동네는 나에게 맞춤인 듯 완벽했다. 나를 보기 위해 우리 집 앞을 거쳐 간 인연들은 하나하나 소중한 추억이다.

옥탑이 있는 집, 친구들과 가까운 집, 번화가와 가까운 집, 방이 여러 개가 있는 집, 복층인 집, 어릴 때는 꿈에도 상상 못 한 완벽한 위치에 완벽한 형태의 나의 집.

나 혼자 쓰는 옥탑에서 친구들과 고기를 구워 먹었다. 친구들이 서울을 구경하다가 혹은 서울을 구경하기 위해 우리 집에 머물렀다. 나름 리모델링을 해보겠다고 시도해보기도 했다. 여러 가구도 들였다. 나를 보겠다고 많은 이들이 집 앞까지 와서 기다렸다. 거의 24시간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으로 인해 몇 시까지 놀든 집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고생고생하며 가서 봤던 불꽃 축제를 집 옥탑에서 보았다. 몇 시간을 전철을 타고 가야만 했던 내가 좋아하는 장소들을 걸어갔다. 친구들이 언제 어디서 부르든 별 고민 없이 갈 수 있었다.

 

 

집을 정리하는 것만큼이나 먹먹한 것은 마지막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일. 몇 년을 알고 지내서 함께한 추억이 많은 친구와의 여행 전 마지막 만남은 크게 와닿지 않았다. 마지막 인사도 장난스럽다. 당분간은 얼굴을 못 볼 것을 알지만, 다른 형태로 연락을 이어나갈 것을 알기에.

 

오히려 크게 친하지는 않은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볼 때 기분이 묘하다. 퇴사하면서 회사 사람들과 영영 마지막이라는 것을 다시금 체감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자주 만나지도 않고, 일상을 공유할 정도로는 친하지 않은 친구들을 마지막으로 만날 때도 마찬가지다.

확률은 매우 낮다는 걸 알지만, 한 켠으로는 여행 잘 다녀오라는 인사가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남아있기도 했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 끝을 내야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 분명히 알고 있지만, 마냥 쉽거나 기쁜 일은 아니다. 미련하게도 잠시 한국을 떠나 필리핀에 갈 정리와 준비를 하면서 6개월 뒤가 될 필리핀을 떠날 때 걱정을 동시에 한다.

미련함에 아이러니까지 더 했는지 사실 떠난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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