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여행일기] 공포 영화 보기 좋은 날

시험 따위

두 번째 시험 기간이 찾아왔다. 총 나흘의 시험 기간이지만, 세 과목씩 이틀만 학교에 가는 것으로 스케줄이 잡혔다.

내일은 세 개의 시험이 있는 날이지만, 며칠째 바기오에는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다. 마마와 아폴 말로는 이 정도는 심한 것도 아니라 하지만, 한국에서 한평생을 살아온 나에겐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정도의 장대비였다.

어릴 때부터 비를 좋아해서 빗소리만 들어도 절로 기분이 좋아졌던 나는 오늘도 그랬다. 내일 당장 시험이 세 개가 있지만 공부가 이곳에서의 첫 번째의 목표가 아니기에 중요하지도 않다. 엘리에게 공포 영화를 보자고 제안했다.

 

공포 영화 보기 좋은 날

영화를 보기 위해 엘리가 거실 소파 겸 침대 위를 치우기 시작했다. 마마의 성모 마리아상이 두 개가 놓여있었고, 마마의 침대 위로 옮겨 놨다.

밖에 비는 계속 무겁게 내리고 있었고, 우리는 노트북을 들고 나란히 침대 위에 앉았다. 그리곤 꽤 오래 넷플릭스를 뒤지며 어떤 영화를 볼지 찾고 있었다.

그때 마마의 방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고, 아폴, 엘리, 덧지와 내가 방으로 들어가서 확인해 보았을 땐 마리아상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떨어진 마리아상은 문이 달린 나무로 만들어진 상자 안에 들어있었는데, 문 안에 있던 유리는 깨져 여러 동강이 나 있었고, 상자는 땅에 뒤집혀있었다.

엘리는 마리아상을 침대 깊숙한 곳에 세워두었다며 항변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엘리를 탓하며 어떻게 해야 하냐며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나는 아까부터 주방 쪽에서 나는 비린내와 마마 방의 강한 향수 냄새가 겹쳐서인지 토가 쏠려 나가 있겠다고 했다.

내 말을 들은 아이들은 바로 그 방에서 나왔다. 나 말고는 아무도 냄새를 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겁이 많은 이 친구들은 내 말에 더욱 겁을 먹었다. 무거운 빗소리 사이로 고양이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급기야 덧지는 눈물을 보였다. 엘리는 영화를 안 보겠다며 포기했다.

마마의 방은 평소에도 마마가 어떤 형체를 보거나, 아폴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누군가 밥 먹는 소리를 듣거나 하는 곳이었다.

주방 쪽 바깥 창문에서는 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알아들을 수 없게 흘러나왔다. 희미하게 목탁 소리도 나는 듯했다.

나는 공포 영화 보기에 완벽한 날이라며 소리치며 좋아했고,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다.

 

무섭지 않은 공포 영화

시간이 좀 지나자 엘리는 공포심이 가라앉기 시작했는지 영화를 보겠다고 말했다. 덧지는 우리 옆에 앉아 캐리비안의 해적을 보았고, 아폴은 핸드폰을 했다.

불을 끄자는 설득은 먹히지 않아서 불을 켜고 영화를 봤다. 영화는 정말 재미없었고 나는 졸았다.

공포 영화 보기 완벽한 날이었지만, 영화는 완벽과 거리가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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