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여행 일기] 공휴일에 응급실

필리핀 용사의 날

필리핀 용사의 날(the day of valor/bataan day)은 2차 대전 당시 희생당한 군인들의 넋을 위로하는 날이다. 공휴일로 지정되어 오늘 하루는 학교에 가지 않고 쉰다. 필리핀인이 아닌 나로서는 이날의 의미를 알지 못했고, 그냥 하나의 빨간 날에 불과하다.

처음에는 일기를 쓸까, 헬스장을 갈까 나름 계획적으로 보낼 고민을 하다가 휴일을 휴일답게 보내자고 마음먹으며 넷플릭스나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작년 11월에 바기오에 처음 와서 시간이 지날수록 날씨가 너무 차서 전기 핫팩을 살 정도였다. 그러다 한 달 전부터는 날이 슬슬 풀리기 시작하더니, 간간이 더위까지 느껴지기도 했다. 오늘도 그랬다. 한시, 두 시가 되어가자 점점 더워졌다.

딱히 한국 음식이 그립지는 않은데, 다른 필리핀 가족에게 한식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 요리는 질색에다, 잘 하지도 못하는 덕에 뭘 해야 할까 고민하며 인터넷을 뒤지며 시간을 보내다가 일단 한국 식료품점에 가보자 하는 마음으로 일어났다.

 

공휴일에 응급실

내 방문을 열면 바로 주방이 보이는데, 엘리가 마마의 머리를 감겨주고 있었다. 어제부터 몸이 안 좋았던 마마의 상태가 크게 호전이 되지 않았나 보다. 그래도 회사에 가기 위해 머리를 감고 있던 거다.

어제 병가로 회사를 가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병원에 가서 진찰증을 끊어야 한다고 했다. 뎀보와 내가 동행하기로 했다.

네 시쯤 집을 나서 문법 선생님인 teacher Lue가 입원했었던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안으로 동행은 한 명밖에 안 된다고 해서 뎀보는 밖에 남았다.

한국에서 응급실을 가보면 정신없이 바쁘고 줄도 길고 했는데, 필리핀에서 응급실을 들어서는 순간 정적으로 둘러싸이는 기분이 들었다. 환자보다 몇 배는 많아 보이는 의료진과 빈 침대만 보였다.

마마는 혈압을 재고, 피를 뽑고, 스테로이드를 맞고, 엑스레이 촬영을 마쳤다. 그리곤 젊어 보이는 까까머리 남자 의사가 들어와서 마마와 따갈로그어로 대화를 나눴다. 중간중간 내게 영어로 설명을 해주었지만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은 물론 없었기에 그냥 듣고 내 의사만 전달하곤 말았다.

마마는 선천성으로 천식이 있어서 병원을 집으로 부를 정도로 어린 시절의 많은 시간을 병원에서 보냈다. 지금은 약으로 연명하다가 이번에 상황이 좀 더 안 좋아져서 열, 등에 통증을 느끼다 병원에 온 것이다.

의사는 바로 입원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마는 일하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의료 테스트 때문에 간신히 붙은 이 직장에서 잘릴까 봐 걱정이 된다고 했다.

마마의 휴일이 목, 금요일인 것을 알았기에 의사에게 이틀 뒤에 입원해도 되냐고 여쭸는데 완강하게 바로 하는 것이 좋다고 대답했다. 이미 높은 위험군에 속해있다고 말을 덧붙였다.

 

의료복지 시스템

마마는 직장도 걱정이지만, 병원비도 걱정했다. 우리나라는 의료 복지 체계가 잘 되어있지만 이곳은 아니다.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근무 월일이 6개월이 넘어야 회사에서 의료 보험을 들어준다고 했다.

정부에서 의료 보험을 보장해주지만 (의사 말에 따르면) 천식의 경우는 통원 치료는 보험 적용이 어렵고, 입원의 경우에나 30%를 보장받는다고 했다.

(나중에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정부지원 의료 보험도 가입한지 6개월이 넘어야 보장이 된다. 마마는 2달이 모자라서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한다.)

병원 비용은 보험을 받지 않은 응급실 비용임에도 불구하고 4만원 정도가 나왔다. 내 생각보다는 매우 저렴한 비용이었다. 하지만 평균 혹은 평균보다 가난한 필리필인 기준으로는 아닌듯했다.

한 시간 반 정도 뒤에 우리는 병원에서 나올 수 있었다. 뎀보는 혼자 밖에서 기다리다가 환장할까 봐 게임을 하라고 핸드폰을 빌려줬다.

의사가 손으로 써 내려간 약 처방전을 들고 약국으로 향했다. 역시나 필리핀답게 삼십 분은 기다려서 약을 처방받았다. 네 종류의 약이었는데 응급실 비용하고 거의 비슷하게 나왔다.

 

평소와 비슷한 저녁

약을 처방받은 후 마마의 회사에 가서 회사 의사에게 진찰 증명서를 제출하고 의료 면담을 해야 했으므로 회사로 향했다. 마마가 면담하는 동안 뎀보와 나는 로비에서 해를 품은 달을 보며 마마를 기다렸다.

마마가 자주 이야기하는 마마 나이대의 잘생긴 서양인 에드와르도를 혹시나 볼 수 있을까 싶어 종종 고개를 들어보았지만 보지 못했다.

4~50분을 기다린 후 마마는 오늘과 내일 병가를 받았다며 나왔고, 저녁을 먹기 위해 SM몰로 향했다. 토론을 사고, 빵을 사고 피자헛으로 가서 끼니를 때웠다.

아폴을 만나고 간단하게 장을 보고 집으로 들어왔다. 씻지도 못하고 잠이 들었다.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씻고 넷플릭스를 보고 다시 잠을 청했다.

Leave a Comment

Start typing and press Enter to sea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