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001] 출국하는 날 / 필리핀 / 마닐라 국제공항 / 면세

 

이사와 출국이 겹치면서 정신없이 몇 주를 보내면서도 누워서 빈둥대느라 결국 마지막 날 새벽까지 짐 정리를 했다. 짐 정리가 길어져 죽을 거 같아 새벽 세 시에 잠을 잤다. 오후 열두 시 오십오 분 비행기였는데 오전에 짐 정리를 마무리해야 했기에 여섯 시에 일어났다.

 

급박한 마음에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니 세 시간이 훌쩍 지났고, 생각보다 집에서 늦게 출발했다. 집이 크게 네 덩이나 되었고 우리 집은 계단 + 언덕의 콤보였다. 집과 마지막 인사를 하랴, 무거운 짐을 하나씩 옮겨 내리느랴 춥고 약한 비가 내리는 날이었는데 땀이 났다. 집에서 서울역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가 되는 짧은 거리인데 이 짐들을 들고 언덕을 내려가기는커녕 한 발자국 움직이는 것도 전쟁이라 카카오 택시를 불렀다.

 

택시 기사들이 선호하지 않은 단거리 운행이라 잘 잡히지 않았다. 가방을 옮기며 세네 번 시도한 끝에 천원을 더 내고 스마트 호출을 했다. 이 택시 기사님이 한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길게 대화하는 상대라는 생각이 들고 기분이 묘했다. 택시 기사님은 일을 시작한 지 열흘 된 신입 기사님이셨고 유쾌하셨다. 기사님의 딸도 나처럼 퇴사하고 놀려 한다고 웃으셨다. 경로상 서울역 공항철도 반대편에 내리는 게 기사님께 편했는데 계속 짐을 걱정하시며 바로 앞까지 데려다주시고 짐도 내려주셨다.

 

택시를 내리고 나서는 진짜 고생이 시작됐다. 짐을 다 합치면 웬만한 사람 무게인 50kg였는데 너무 만만하게 봤던 게 문제였다. 짐을 한 번에 다 가지고 가는 건 무리겠다 싶어서 두 덩이로 나눠서 두 번씩 움직이고 나서야 간신히 인천공항으로 가는 전철을 탈 수 있었다.

 

전철에서는 눈을 붙이려는 게 애초의 계획이었으나 할 게 산더미였다. 부동산에 연락해서 열쇠를 어디에 두었는지 말하고, 핸드폰 알뜰폰 통신사에 전화해서 개통하고, 며칠 전에 산 물건이 잘못 결제되어서 고객센터에 글 올렸던 거 확인하고, 가기 전 마지막으로 카톡하고, 아빠한테 이삿짐에 대해서 설명하고, 필리핀에서 나가는 제주 항공 비행기 표도 샀다.

 

공항에 도착하니 바로 앞에서 탈 것을 운전하고 계신 공항 직원이 나를 불러서 태워주셨다. 원래는 노약자 전용인데 서비스라고 태워주신다고 하셨다. 말도 안 되는 짐을 보고 도와주신 듯하다.

 

바로 탑승동으로 가서 체크아웃하려는데 짐 무게가 초과했다고 1kg당 2.5만 원을 더 내란다. 무게를 초과한 건 잘못이긴 하지만 이런 거로 돈을 벌려는 게 보여서 필리핀에서 호주로 넘어갈 때는 비싸도 대형항공사를 이용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마음도 편하고 몸도 편한 방법이다. 수화물로 부치는 가방 중의 하나는 옷에 큰 비닐을 감싸고 다시 에코백에 넣고 테이프로 안전하게 둘둘 감은 형태였는데 이렇게는 부칠 수 없다며 편의점 가서 지퍼 달린 가방을 사서 넣으라고 하셨다.

 

부랴부랴 편의점을 가니 다이소에 천 원에 파는 가방이 칠천원에 팔았다. 어이가 없었지만 살 수밖에 없었다. 다시 돌아와서 3kg을 초과해서 6만 5천 원이나 더 내고 나서야 짐을 부칠 수 있었다.

 

왔다 갔다 하느라 시간이 꽤 지나서 다시 입국장으로 내려가서 미리 신청한 환전한 돈을 수령하는데 빠른 걸음으로 움직여야 했다. 돈을 수령하고 출국 심사를 거쳐 바로 탑승동으로 가서 면세 물품을 수령했다. 다행히 줄이 길지 않았다. 신세계 면세는 줄이 아예 없었고, 롯데 면세점에서는 5분가량 기다려야 했는데 그동안 신세계 면세에서 받은 면세용품 해체를 하며 기다렸다.

 

40분까지 비행기 탑승을 완료해야 했는데 간신히 그 시간 무렵에 플랫폼에 도착했다. 기다리는 줄이 하나도 없어서 내가 마지막이겠구나 하고 들어가려는데 아직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던 거였다. 비행기가 한 시간이나 지연이 됐다.

 

기내식을 먹고 한 시간 정도 잠을 자고 나서 필리핀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무거운 공기가 바로 코로 들어왔다. 화장실로 가서 짐을 일단 정리했다. 비행기가 지연돼서 입국장에서 필리핀 친구 레드가 나를 기다릴 것을 알기에 서둘렀다.

입국장에는 꽤 많은 사람이 서 있었다. 그 인파 속 가장 끝에 레드가 내 이름이 적힌 팻말을 들고 서 있었다. 레드는 화상으로 보던 그 모습 그대로에 키만 조금 작았다. 레드를 만나 반가운 것도 잠시 달러로 환전했던 돈을 필리핀 페소로 다시 환전했다. 마닐라 시내로 나갈 수가 없어서 공항에서 그냥 환전했다.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레드와 동행한 레드의 사촌들을 기다렸다. 동남아시아는 유난히 빠르게 어두워지는 것 같다.

 

차를 타고 몇 시간을 달리며 여러 대화를 나누었다. 그중 한 주제는 레드 친구들에 대한 주제였다. 레드 친구 중 한 명이 12월에 결혼하는데 한 번도 안 본 사우디 사는 필리핀 여자와 결혼을 한다고 했다. 내가 심하게 놀라니 해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본인이 알기로는 어릴 때 알던 사이인데 최근에 다시 연락이 닿아서 페이스북으로 연애를 하다가 결혼 날짜를 잡은 거라고 했다. 어릴 때 만난 적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또 다른 여자인 친구는 어릴 때 어떤 영화를 보고서는 ‘포레스트’라는 성을 가진 사람과 결혼해서 자신도 ‘포레스트’가 되겠다고 항상 말했다고 했다. 그 친구는 눈도 좋아하고 미국도 좋아해서 미국에 사는 ‘포레스트’와 결혼하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그리고선 실행에 옮기기 위해 야후 채팅을 매일 같이 접속해서 ‘포레스트’를 찾았다고 했다. 결국, 그 친구는 미국에 아이 둘을 낳고 잘살고 있다고 한다.

 

지나는 길에 세븐틴 광고판을 보았고, 박서준 광고판도 보았다. 라디오에서 빅뱅의 판타스틱 베이비와 싸이의 대디 노래가 연속으로 나왔다. 에어컨은 더위를 쫓아내다 너무 추울 지경이었지만, 피곤함에 극에 달했던 나는 깊게 잠이 들었다.

꽤 길게 잤다고 생각했을 때 레드가 나를 깨웠다. 이제 도착했나 싶었지만, 아직 갈 길은 멀었고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차를 멈춘 거였다. 필리핀에서 유명한 패스트푸드 음식점인 졸리비에서 저녁을 먹었다. 삼 개월 전 필리핀에 일주일간 봉사를 하러 왔을 때 졸리비에 반하고, 계속 그리워했던 차였다. 한국의 치킨은 독보적인 맛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같은 맛을 필리핀에서 맛볼 수 있다. 특이한 점은 이곳의 스파게티는 정말 달다.

내 친구는 졸리비의 스파게티가 달아서 맥도날드의 스파게티도 덩달아 달아졌다며 불평을 하기도 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필리핀 음식은 좀 더 달고, 좀 더 부드럽다.

 

 

 

다시 차에 타고 잠이 드니 어느새 레드네 집에 도착했다. 가장 눈에 먼저 띈 건 마운틴듀로 울타리를 장식한 것. 속으로 나 혼자 집에 별명을 붙였다. 마운틴뷰 집.

나중에 알고 보니 필리핀에서 마운틴뷰로 장식한 집을 찾는 것은 그닥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마운틴듀로 만든 별 장식도 고요한 밤에 느릿느릿 돌았다. 하늘에 별은 쏟아질 듯 많았다.

 

 

 

깨어있는 몇몇 가족들과 어둠 속에서 인사를 나눈 뒤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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