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032 필리핀] 바기오의 숨겨진 명소, 메리놀 보호구역을 다녀오다.

오늘은 나의 예전 화상 영어 선생님인 데아를 만나기로 한 날이다. 데아는 내 또래이지만 이미 두 아이의 엄마이다. 우리는 이 주 전 만날 약속을 잡았고, 데아가 쉬기 좋은 장소인 메리놀을 가자고 말했다.

 

아쉽게도 어제 비가 와서 데아는 오늘 메리놀을 가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대신 과일과 채소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곳을 알려준다고 했다. 

우리는 열두 시에 지프니 정류장 앞에서 만났다. 그동안 화상으로 보던 모습과는 약간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으로서 나를 가르칠 때는 천천히 말해서 그랬던 걸까. 앳된 얼굴에 영어도 잘하고 본인을 따라오라 리드하니 괜히 걸크러쉬가 일었다.

 

우리는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을 한 바퀴 돌며 여기는 비싼 곳, 여기는 싼 곳 하며 설명을 해줬다. 그러다 어느 건물로 들어갔는데, 지하에는 교복이나 관광객을 위한 열쇠고리가 팔고 있었다. 교복을 보는데 질이 좋은 게 느껴졌다.

같은 건물의 이 층은 미용실이 몰려있는 곳이었다. 필리핀은 게이가 거리낌 없이 자신이 게이라고 밝힐 수 있는 사회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용 업계에 종사하는 게이가 많다. 이 층에 올라서자마자 여러 명의 게이가 호객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데아는 오늘 비도 안 올 것 같으니 원래대로 메리놀을 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는 좋다고 대답했다. 데아는 메리놀에 간 지 오래되어서 기억이 안 난다며 주변 사람들에게 묻기 시작했다.

이곳의 언어를 모르지만 느낄 수는 있다. 항상 내 옆의 필리핀 친구가 주변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볼 때면 그들은 항상 친절하다. 그리고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묻는다. 그리곤 내게 말을 건넨다. “안녕하세요.”

 

그들은 지프니가 없으니 택시를 타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건물을 벗어나 택시를 타기 위해 줄을 섰다. 택시를 타는 곳이지만 푯말이라든지 의자라든지는 없었다. 바기오에서 오래 산 사람이 아니면 이곳이 택시를 타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는 없다.

 

택시에 타니 데아가 나를 위해 만들었다며 초콜릿과 바나나, 건포도를 넣은 푸코(필리핀 떡)를 줬다. 나도 준비한 한국 과자를 몇 개 건넸다. 초콜릿이니 아들들이 좋아할 거라는 말도 전했다.

나는 택시에서 곧바로 푸토를 먹어봤다. 조금 맛만 보려던 건데, 달고 부드러워 계속 손이 갔다. 나중에 꼭 만드는 법을 알려달라고 말했다.

 

 

메리놀에 도착해서 사무소로 향했다. 50페소의 입장료가 있었다. 표를 산 후 경비원께 드리니 입구로 같이 가서 문을 열어주셨다.

 

입장하고 걸은 지 얼마 안 되어 꾸보가 보여 아는 척을 할 겸 데아에게 저기 꾸보가 있다고 외쳤다. 데아는 꾸보가 아니라고 답했다. 대나무로 만들어진 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잠시 앉아서 수다를 떨었다. 지붕에 그늘이 생기니 제법 서늘했다.

 

 

제법 긴 수다를 떨었다. 메리놀은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만 운영이 되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리놀엔 커피나무가 많았다. 커피나무를 실제로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건 처음이었다. 아직 익지 않은 열매를 맛봤는데 쓸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하얗고 부드럽고 아무 맛이 안 났다. 다 익었지만, 아직 마르지 않은 열매도 먹어봤는데 검고 씹는 느낌이 좋고 아무 맛이 안 났다.

 

좀 더 걸으니 인공으로 만든 작은 동굴이 보였다. 동굴 안에는 바기오에서 자주 보이는 필리핀 조상 모양의 장식물이 있었다. 데아에게 저기 너희 조상이 있다며 이번에도 아는 척을 했다. 데아는 저건 미라 동상이라고 했다.

 

 

필리핀엔 여러 부족이 있었는데, 바기오 보다도 더 북 쪽에 살던 한 부족의 장례 절차라고 했다. 시신을 미라로 만든 뒤, 나무로 만든 관에 넣어 산 절벽에 매다는 식이다. 시신을 미라로 만들 때 따로 묶거나 하지 않아 근육 수축으로 모든 관절이 접힌 모양의 미라였다. 그런 후 동물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나무 관에 넣어 높은 곳에 매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곳에서 엄청나게 큰 거미도 보았다.

 

다시 걷다 보니 이번에는 둥그렇게 앉을 수 있는 돌이 있었다. 데아는 그곳에 앉더니, 부족 시대에 각 가족의 리더들이 모여 각종 상의를 나누던 곳이라고 했다. 작게는 일상 대화부터 정치적인 토론까지 이루어졌다고 했다. 로마가 생각이 났다.

 

가운데에는 식물이 심겨 있었는데, 원래는 나무 땔감을 넣을 수 있는 돌로 만든 화로가 있다고 했다. 이 역시 북쪽 부족의 유산으로 밤이 되면 추워지기 때문에 나무를 모아 불을 때우고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더 걸으니 나무처럼 생겼지만, 돌로 만든 토론장이 또 보였다. 이번에는 가운데에 화로도 있었다. 다만 물이 고여 있고 큰 소라고둥도 보였다. 어느 관광지나 그렇듯 물이 고여 있으니 사람들의 소원이 담긴 동전들도 있었다.

 

메리놀은 사유지다. 바기오에 사는 대부분의 내 친구들은 바기오가 나무를 무분별하게 베며 발전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데아도 그랬다. 메리놀은 사유지이기 때문에 자연이 지켜지고 있어서 좋다고 했다. 나 또한 자연의 향기에 계속 큰 숨을 들이마셨다.

 

좀 더 걸으니 출구가 나왔다. 데아는 동생에게 받은 사진이 있는데 아직 그곳을 보지 못했다며 다시 돌아가자는 제안을 했다. 얼마 걷지 않아 데아가 말한 곳이 나왔는데 장관이었다.

 

메리놀은 그다지 높은 곳에 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마치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처럼 멋졌다. 안개가 껴 있었고, 데아에게 안개가 껴서 멋있다고 말하니 이 정도면 안개가 낀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반대편 산이 보였다. 그야말로 산이었는데 사이사이 집들도 보였다. 지프니는 물론 택시도 올라갈 수 없는 길이기에 데아는 집을 지을 때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사람들이 옮겨 날랐을 거라고 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줄을 지어 집으로 향하는 게 개미처럼 작게 보였다. 그리고 그들보다 더 높은 곳에서 그들을 발견한 개가 신나서 그들에게 뛰어가는 게 보였다. 동화 같았다. 그러곤 데아가 말하는 정도의 안개가 껴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됐다.

 

네 시가 넘어 밖으로 나왔다. 이미 문이 잠겨 있어 우리가 문을 열고 나왔다. 필리핀은 대문이 대부분 이런 식이다. 잠그긴 하지만 자물쇠를 대체로 달지 않아 누구나 열 수 있다.

혹시나 몰라 다시 사무실로 가서 나간다고 말을 하고 나왔다.

 

사무실을 나오니 지프니가 지나가는 게 보여 지프니를 타기로 했다. 어린 한국인 커플이 보였는데 근처에 한인 교회가 있어서 교회 신자이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했다.

 

데아가 살 것이 있다고 해서 SM몰로 갔다. 지프니를 탄지 얼마 안 되어 바로 내려서 깜짝 놀랐다. 시내랑 가까운 곳에 메리놀이 있던 거다.

 

왓슨스만 잠깐 들린 후, 시내로 향했다. 가면서 데아가 나에게 야콘을 먹어본 적 있느냐고 물었다. 먹어봤는지 안 먹어봤는지조차 모른다고 답하니, 시장으로 가서 한번 먹어보자고 했다.

 

그 전에 또 들릴 곳이 있다며 으슥한 건물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주차장 안쪽 끝까지 걸어가자 작은 가게가 나왔다. 영화에서 암거래하는 것처럼 겉으로는 수영복을 팔고 있었지만, 데아가 본인의 이름을 대니 상점 주인은 수첩을 꺼내 데아의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칸칸이 나뉜 서랍장이 가게 뒤편에 놓여 있었다. 작은 비닐 봉투를 꺼내 데아에게 건넸다. 데아는 조심스럽게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곤 돈을 내고 밖으로 내왔다.

 

조심스럽게 저게 뭐냐고 물어보니, 페이스북에서 물건을 거래하는데 서로 만날 수 없을 때 이용하는 서비스라고 했다. 하루에 5페소(한화 약 100원)만 내면 된다고 했다. 다른 지역은 모르겠지만 바기오에는 이런 서비스하는 곳이 많아서 우리가 갔던 그 건물에 데아가 아는 곳만 세 곳이 있다고 했다.

 

킹은 중고로 스마트폰을 샀고, 애폴은 중고 옷을 팔았고, 데아는 거래를 위해 짐 맡기는 서비스를 이용했다. 바기오 젊은 사람들은 중고 거래를 많이 이용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린 시장으로 향했다. 야콘을 맛봤는데, 맛이 있었지만 나는 사지 않고 데아만 샀다. 나는 대신 망고를 샀다. 1kg에 180페소 한화로 약 4,000원이 안 하는 돈이다. 망고가 매우 커서 두 개 샀을 뿐인데 벌써 900g이었다.

데아는 내게 맛 좋은 망고를 고르는 방법을 알려줬다. 주황빛이 돌고, 꼭지가 파인 망고를 고르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내 눈에는 모두 밝은 노란색으로 보일 뿐이었다. 데아가 나를 위해 망고를 골라줬다.

 

그러곤 우리는 헤어졌다. 평일의 6시는 지프니를 타기 위해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하지만 일요일인 오늘은 긴 줄 없이 지프니를 타고 집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데아에게 문자를 보내고, 마마와 데아가 만들어준 푸토를 먹었다. 망고도 하나 먹었는데 내가 평생 먹어본 망고 중 최고로 맛있는 망고였다.

 

엄청 피곤해서 당장이라도 잠이 들 줄 알았는데 빅마마와 대화는 언제나 길어진다. 필리핀과 한국의 근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빅마마는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걸 멈추지 않았고 나는 그걸 지적했다.

 

댄 에릭 망고 아이스크림도 드디어 먹었다. 과하게 단 감도 있었지만, 맛있어서 앞으로도 계속 먹을 거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서 카페나 도서관에 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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